자작소설-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2 (한 번에 다 안올라가서 나눠올려요)
10년 전 -2
“성희 선배!”
강남역 2번출구의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서자 여러 사람 가운데 그녀의 종종거리며 나아가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많은 인파 사이에서 단번에 발견 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나도 모르게 계속 두리번거리며 찾아 헤맨 내 두 눈의 공이 제일 크지 싶다. 그녀는 내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오른쪽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내리며 살포시 돌아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교차하였을 때 나는 손을 흔들었고 그녀는 환한 미소로 답하였다.
“난 줄 어떻게 알았어요?”
“글쎄 눈앞에 뒷모습이 엄청 아름다운 사람이 지나가 길래 일단 부르고 봤죠. 그게 선배가 맞으면 난 점수를 딸 테고 다른 낯선 여자였으면 착각을 빌미로 인연을 만들어 볼 수도 있으니까?”
“안타깝게도 방금 그 뒷말 덕에 점수는 따지 못하셨네요.”
“이런! 언제는 진실한 남자가 좋다고 해놓고선.”
까르르 웃는 그녀의 상큼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걸을 때마다 흩날리는 그녀의 긴 머리가 싱그러운 여름의 향기를 머금었다. 그녀의 의도치 않은 몸짓 하나 하나가 빠짐없이 모두 아름다웠다.
“남구씨 근데 그거 알아요? 가끔 남구씨가 조용해질 때 남구씨 눈을 바라보면 되게 변태 같아 보여요.”
“뭐요? 변태? 다른 좋은 말 다 놔두고 표현 할 단어가 정말 그뿐이에요?”
“하지만 정말인걸요? 그러니까 다른 여자들 앞에선 절대 그런 눈 하면 안돼요. 나는 다 이해하니까 정 하고 싶으면 나한테만 그런 눈빛을 보여야 해요, 알았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회사 로비층에 도착하였다. 역에서 회사까지 10분씩이나 걸리는 불편함을 때때로 불평했지만 그녀를 만나 이렇게 함께 걸을 때면 10분밖에 걸리지 않음이 못내 아쉬웠다.
“뭐야. 니들 왜 같이 와. 사내 연애 금지인거 몰라?”
마침 엘리베이터 앞에 있던 안 대리가 익살스런 목소리로 인사대신 장난을 쳤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당황할 만도 하것만 성희씨는 아주 익숙하게 받아넘겼다.
“겨우 같이 걸어온 거 정도로 사귀는 거면 술 마시고 집까지 바래다주는 누구누구는 이미 결혼까지 한 사이인건가.”
“어이 잠깐만. 유성희씨가 말한 그 누구누구에 혹시 내가 들어가 있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요, 안중수 대리님. 집까지 바래다 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면서요? 그럼 대체 몇 명이랑 결혼한 거야.”
“떽! 누구 혼삿길 막으려고 그런 루머를 퍼뜨려!”
항상 보면 장난은 안 대리가 먼저 시작하지만 당하는 것도 항상 안 대리였다. 저것이야 말로 안 대리의 능력이었다. 장난은 치되 반격할 여지를 둬서 자신을 낮춤으로써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끔 해주는 재주가 몹시도 탁월하였다. 그의 인기비결 중 하나가 바로 저런 화법이 아닌가 싶다.
오전은 영업팀을 비롯한 소트웨어사업부 전체회의준비로 상당히 분주하였다. 회사에서 이번에 개발을 완료한 오피스마스터라는 소프트웨어와 관련하여 설명, 분석, 판로개척 등 종합적인 미팅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회사에서 전략적으로 개발한 상품이라 추후 회사의 주력상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제품이라 하였다.
“오피스마스터는 알다시피 MS의 쉐어포인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품입니다. 대략적인 기능은 다들 알고 있겠지만 주요 기능을 다시 한 번 집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회의에서 제품소개를 맡은 개발1팀장은 큼큼 거리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오피스마스터는 유저의 문서나 사진 등의 자료파일을 자동으로 별도의 서버에 저장시킵니다. 유저 컴퓨터에서 A라는 문서를 만들어 저장하면 자동으로 동시에 서버 쪽에 A라는 문서가 미러링되어 생성됩니다. 컴퓨터의 고장이나 실수로 문서가 삭제되어도 서버쪽 데이터는 완벽히 보존되어있죠. 또한 응용프로그램이 클라이언트에 설치되 있지 않고 서버쪽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관리가 용이합니다. 일례로 어느 회사에 100명이 직원이 전부 포토샵을 사용해야한다고 하면 1카피당 100만원씩 약 1억원의 라이센스 비용을 지불하고 사용해야합니다. 하지만 오피스마스터를 이용해 서버에서 설치관리를 한다면 동시접속자 수를 계산하여 동시접속수가 30명이면 굳이 100카피 전부가 아니라 30카피만 구매하여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7000만원의 비용절감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쉐어포인트와 차별화된 가장 큰 기능중 하나로 오피스마스터는 컴퓨터에 일종의 쉴드를 설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유저의 컴퓨터에 쉴드기능을 켜놓는다면 해당 컴퓨터는 그 어떤 것들로부터 완벽히 보호가 됩니다. 악성코드나 바이러스, 혹은 실수로 인한 주요 파일 삭제 등, 언제든지 쉴드 이전 상태로 완벽 복원이 가능해집니다. 따라서 오피스마스터의 주요기능을 전부 원활하게 사용하게 될 경우 사실상 안티바이러스프로그램이 필요가 없게 됩니다. 백신을 굳이 설치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죠.”
“쉴드라는 개념이 사실상 바이러스의 침입을 막아주는 게 아니라 원점복원기능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라고 이해하면 됩니까?”
“정확합니다. 쉴드 자체가 실시간으로 공격을 막아주는 게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을 원하는 때에, 예를 들면 리부팅 같은 것을 통해 원상태로 돌려주는 일종의 순간복원솔루션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쉴드로 보호받고 있더라도 바이러스는 얼마든지 걸릴 수 있기 때문에 백신을 안 쓸 수 없지 않습니까? 중요한 작업을 하는 과정 중에 바이러스가 걸리면 해당 PC에서 완성한 작업물은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가 되지 않습니까? 아무리 리부트로 바이러스 걸리기 이전상태로 복원한다하여도 작업하면서 감염된 파일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좋은 지적입니다. 쉴드가 실시간 방어체계는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바이러스가 감염이 될 수 있습니다. 리부트로 언제든지 바이러스 걸리기 이전 상태로 돌이킨다하더라도 작성중인 파일에 감염되는 건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다만 해당파일은 작성됨과 동시에 미러링 되어 클라우드 서버로 동시 저장이 되고 클라우드 서버엔 2중 3중에 걸친 안티바이러스시스템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바이러스 걸린 파일이 서버에 저장되기 전에 치료과정을 거치고 치료가 완벽하게 된 파일만 저장이 됩니다.”
“그렇다면 치료 불가능한 파일일 경우 서버에 저장되지 않고 삭제가 되는 겁니까? 그렇다면 문제의 소지가 있겠는데요.”
“바이러스라는 게 매일, 실시간으로 걸리는 건 아니기 때문에 비용절감차원에서 감수하고 사용하길 원하는 회사도 분명히 존재할 겁니다. 그런 회사에게 대해선 이런 방향성을 제시하는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유저 컴퓨터마다 개인백신이 깔려있는 편이 훨씬 더 안정적이긴 합니다.”
회의실의 열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우리 팀에서도 여러 번 질문하며 궁금증을 풀었고 다른 팀에서도 많은 인원들이 서로의 의견을 제시하면서 열띤 토론의 장이 열렸다. 직급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이야기가 오가는 분위기가 인상 깊었다.
“영업이라는 게 제가 생각한 거 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일 같아요. 결국 회사가 돈을 벌려면 저희가 잘 팔아야 하는 거잖아요.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 같아서 재밌고 신이 나는데요.”
오후까지 이어진 긴 회의를 마치고 팀원들끼리 가볍게 가진 티타임에서 나는 회의 때 느낀 소감을 간단히 말했다. 입사지원 할 때 개발팀과 영업팀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었는데 역시나 영업팀을 선택한 건 참 잘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남규씨, 반대로 가장 중요한 역할이 마음먹은 대로 잘 안되면 회사는 망하는 거야. 책임이 막중하다고.”
“그래. 의욕도 좋지만 신중함도 같이 겸비해야해. 특히나 기존제품이 아닌 신제품 영업은 시장에 발을 내딛는 첫 이미지가 상당히 중요하니까.”
다소 들떠있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차례로 조언하는 안 대리와 김 대리에게 허투루 듣고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나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오늘 하도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다 칼칼하네. 시간들 되면 퇴근하고 시원한 맥주 한잔 어떠신가?”
“팀장님! 저 요 앞에 아주 괜찮은 수제맥줏집 알아요! 얼마 전에 가봤는데 진짜 괜찮더라구요.”
“성희씨 딱 걸렸어. 누구랑 간 거야. 남자랑 갔지!”
“안 대리님! 남자나 좀 소개 시켜주고 그런 말하시라고요.”
“소개 시켜준다고 할 때마다 튕겨놓고선. 그럼 다시 한 번 주선해? 기획팀 박 대리 괜찮잖아. 박찬수 대리.”
“아니 저기요, 꼭 소개남을 회사 안에서 찾아야 해요? 사내연애 금지라면서요!”
우리 팀은 6시가 되자마자 부리나케 회사를 빠져나왔다. 갑작스런 회식이었지만 다른 약속이 있는 사람이 없었는지 모처럼 팀원 전체가 함께하는 자리가 되었다. 안 대리와 성희씨가 맥줏집을 두고 몇 번의 티격태격을 더 하였지만 결국 성희씨가 원하는 B&U를 다시 가게 되었다.
“여기 진짜 수제 맥줏집 맞아? 전혀 아닌 분위기인데?”
“이그, 촌스럽기는. 이거 요즘 젊은 감성이거든요!”
그녀가 안 대리를 타박하는 모습이 몹시도 귀여웠다. 그녀 역시도 첫 방문 때는 생소한 분위기에 많이 놀라워했으면서도 어느새 젊은 감성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곧 우리는 맘에든 자리를 골라 앉고 분주히 메뉴를 골랐다. 그녀의 강력한 주장으로 모둠소시지와 후라이드치킨 케이준 샐러드로 결정되었다.
가벼운 농담, 업무적인 이야기, 사는 이야기 등등 다채로운 주제가 오고가자 어느새 각자가 비운 잔이 4잔 이상씩이 되었다. 그 뒤로도 몇 잔의 술을 더 비우며 어느 정도 시간이 깊어지자 담배나 화장실 등으로 서로서로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늘어갔다. 나 역시도 몇 번이나 화장실을 가기위해 자리를 비웠고 얼마 뒤 화장실 앞에서 반쯤 눈이 풀린 김 대리를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
같이 술자리를 많이 가져본 것은 아니었지만 김 대리의 흐트러진 모습을 처음 본 나로서는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평소에 한상 반듯하고 지적이며 다소 시크한 모습만 봐 왔던 터라 더욱 더 그랬다.
나는 그를 따라서 건물 밖으로 나갔다.
5월인데도 밤공기는 다소 쌀쌀했다. 김 대리는 말없이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고 한 개비를 더 꺼내 내게 내밀었다.
“저는 담배 필줄 모릅니다.”
“의외네. 꽤나 놀게 생겼으면서.”
그는 내 민 담배를 짚어 넣고 입에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댕겼다. 검은 하늘을 향해 뱉은 하얀 연기가 삽시간에 흩어졌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두 세 번의 연기가 더 뿜어질 때까지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근데 둘이 무슨 사이냐?”
“네?”
“너랑 성희 말이야. 무슨 사이냐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이긴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지. 다시 한 번 묻지. 둘이 무슨 사이야?”
예상치 못한 물음에 나는 한동안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질문 의도가 무엇인지, 뜬금없이 그걸 왜 묻는 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그늘진 표정으로 미루어 절대 장난삼아 던진 질문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퇴근 하고서도 둘이서만 종종 어울리나 보더라?”
확신을 갖고 묻는 그에게 아니라고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집 방향이 비슷해 몇 번 같이 퇴근하다가 의기투합한 적이 있었노라고 대답하였다.
“주말에도 따로 만나고 그래?”
“그런 적은 없습니다.”
나는 그의 계속되는 추궁에 고분고분 답하였다. 하지만 대화가 오갈수록 내가 죄인도 아닌데 취조당하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언짢아졌다. 안 그래도 지난번에 과음하고 뽀뽀를 한 뒤로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라 그의 추궁이 더더욱 불쾌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둘이 사귀어?”
“아닙니다. 근데 그걸 왜 묻는 겁니까? 솔직히 저는 성희선배 마음에 있습니다. 밝고 활기찬 모습이 너무 좋습니다. 제가 아직 회사적응도 못하였고 직장 선배라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언젠간 고백할 겁니다. 됐습니까?”
나는 술김에 조금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말을 뱉는 와중에 이미 실수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지만 한 번 열린 입은 다 말할 때까지 닫히지 않았다. 나는 다소 건방지게 말한 것에 대해 김 대리가 화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김 대리는 정말 의외의 얘기를 꺼냈다.
“남자가 뽀뽀까지 하고 미적미적 거리면 그게 얼마나 나쁜 건 줄 알아?”
“네??? 뭐라고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나는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머릿속이 일순 멍해졌다가 갑자기 밀려오는 오만가지 생각에 정신이 없게 되었다. 누구한테 들은 거지? 그 술집에서 본건가? 사람도 거의 없었는데?
“무슨 말이긴 무슨 말이야. 너 유성희 주사 모르냐?”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등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안 대리가 있었다.
“안 그래도 제가 불러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김 대리님이 먼저 얘기 꺼내셨구나. 하여튼 이놈이 남자망신 다시켜요 다시켜.”
“...안 대리님도 아시는 겁니까?”
“뭐를? 니가 뽀뽀하고 여태 고백도 안하고 이도 저도 아닌 사이로 만들어서 성희 힘들게 만든 거? 나뿐만 이겠냐. 팀장님도 알고 이젠 술집사람들까지 다 안다 다 알아. 네가 아직 신입이라 모르나본데 성희 주사가 바로 비밀얘기 털어놓는 거다. 당사자만 없으면 미주알고주알 다 떠벌려요. 너 화장실 갈 때 마다 여기서 남규가 자길 덮쳤는데 책임도 안진다고 어찌나 떠들어대는지. 야, 오직했으면 김 대리님이 널 불러다가 얘기하겠냐. 빨리 들어가자. 조만간 팀장님도 나와서 한 마디 하시겠다.”
나는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몰랐다. 김 대리는 내 왼쪽 어깨를 두드리며 “잘해”라고 짧은 한 마디와 함께 술집으로 들어갔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오늘 쌓인 취기가 단숨에 다 날아가 버린 느낌이었다. 안 대리는 담배 한 대 피고 갈 테니 먼저 들어가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술집 계단을 오르면서 민망함과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벌게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왜일까.
2017년 5월 31일 수요일.
나는 요즘 자기 전 하루를 되새김질하며 일기를 적는다. 사실 일기라기보다 내 행적을 자세히 적어 넣은 일지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혹시나 또 하루를 잃어버릴까봐, 그 때가되면 이 일지를 확인하며 기억을 더듬어 볼 요량으로 최대한 자세히 적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나는 그 일지가 필요한 날임을 눈을 뜨자마자 확인한 핸드폰 시계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수요일! 수요일이다. 불과 2주 만에 나는 또 다시 하루를 잃었다. 일지를 적고도 모자라 자기 전에 그렇게 하루 동안의 일과를 되뇌며 잠을 청했건만 또다시 깡그리 기억이 날아가 버렸다.
기억을 잃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건 아닌가,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는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책상위의 일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곳엔 놀랍게도 월요일 밤 11시 이후로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일지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거지. 기억하기 위해 매일 일지를 적었는데 공교롭게도 기억을 잃은 날의 기록만 없었다. 그 날의 기억이 나질 않으니 그날만 대체 왜 일지를 적지 않았는지의 기억도 해낼 수가 없었다.
“이런 제기랄!”
절로 욕지거리가 치밀었다. 신은 나에게만 너무 가혹했다. 내가 뭘 얼마나 잘못했기에 나한테만 이런 시련을 몰아 주냔 말이다.
설령 기억을 잃어도 긍정적으로 대처하겠다던 나의 마음가짐은 실제로 잃어버린 현실의 아침에선 온대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그렇게 더러운 기분으로 출근을 하기위해 내 차에 몸을 실었다.
꽉 막힌 강변북로 위에서 빌리조엘의 피아노맨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시끌벅적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조용하지도 않은 적당한 소음의 Bar가 그러졌다. 단짝 친구 진환이와 나중에 술집하나 차려서 매일같이 어울리는 꿈을 가진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꿈도 친구도 현실에서 너무 많이 멀어졌다. 문뜩 그녀석이 보고 싶었지만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 끝내 전화번호는 누르지 못했다.
회사에 도착한 나는 기계적인 인사와 함께 내 자리로 향했다. 책상위엔 서류봉투가 반듯하게 하나 올려져 있었다. 설마 또? 라는 마음으로 서둘러 열어보니 역시나 계약서였다. 4장의 계약서. 기억을 잃은 날의 나는 정말 초인이라도 된 것일까? 정말 매번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기억을 잃는다는 게 정말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밀려왔다. 어쩌면 이건 악마의 저주가 아니라 신이 내려준 축복이 아닐까?
나의 하루는, 아니 설령 나의 일주일 일지라도 책상위의 계약서 한 장보다 값어치가 떨어졌다. 한 달 내내 영업해서 네 대도 못 판 날들이 수두룩한 데 단 하루만에 4건의 계약을 했다는 것은 하루를 잃어버린 대가로 한 달을 얻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간에 날 힘들게 했던 일들이 실은 내게 힘이 되는 일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마음고생 한 것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강과장 축하해. 이달에 11대나 했다면서. 자네가 이달의 실적왕이야. 대체 비결이 뭐야?”
내게 실적왕이라는 칭호가 붙는 날이 올 줄이야. 송차장의 축하는 다시 한 번 내게 벌어진 일이 저주가 아니고 축복임을 알게 해주었다. 계약하느라 고생한 어제의 나에게 술 한 잔 사주고 싶었다. 결국 마시는 건 오늘의 내가 될 테지만.
운전을 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에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그 달에 번 돈은 그 달에 쓰기도 바쁜 지난날들과는 조금 다른 날들이 앞으로의 미래에 펼쳐질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서른다섯, 통장엔 500여 만원 남짓한 돈과 1000에 50짜리 월세 방이 전부인 내 인생에 돌파구가 되 줄 것만 같았다.
나도 이제 노력한다면, 물론 기억을 잃는 걸 내가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연애도 하고 어쩜 결혼도 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상상만으로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퇴근 후, 종종 가던 포장마차를 찾았다. 집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기 너무 외롭다고 느껴질 때마다 가던 곳이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혼자 술을 마시는 건 마찬가지지만 지나가는 사람들, 혹은 오고가는 손님들을 눈요기 삼으면 그래도 외로움이 조금은 덜해지곤 했었다.
“골뱅이 하나 주세요.”
50중반쯤 되는 주인아줌마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익숙한 손길로 안주를 준비했다.
곧 뜨겁게 쪄진 골뱅이와 양파와 마늘 따위의 밑반찬 몇 개가 같이 나왔다. 별 얘기 없어도 참이슬 오리지널과 오뎅국물 역시 테이블위에 함께 놓여졌다.
“잔 하나만 더 주세요.”
“매번 혼자더니, 오늘은 누가 오나봐?”
“아뇨, 그냥 잔 두 개로 먹게요.”
“별, 궁상은.”
주인아줌마가 혀를 차며 씰룩거렸다. 특유의 툭툭 거리는 말투가 처음 찾은 사람들에겐 불쾌함을 줄 수도 있지만 그 안에 따뜻함이 있기에 나는 또 이곳을 찾는다.
나는 곧 건네받은 잔까지 술을 따라 눈앞에 두 잔의 술잔을 만들었다. 왼손은 어제의 나를 위해, 오른손은 오늘의 나를 위해.
“우리 종종 봅시다. 그리고 어렴풋하게라도 기억이 좀 나면 좋을 거 같은데.”
나는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혼잣말을 하며 양손의 잔을 부딪쳤다. 왼 손의 잔을 단숨에 들이켰고 오른손의 잔 역시 마찬가지로 비웠다.
“캬아. 거 술 잘 드시네. 한잔 더 받으쇼.”
양손으로 건배를 하니 안주 집어먹을 손이 모자랐다. 주인아줌마가 안주 처먹으면서 마시라는 소리를 내뱉기 전까지 나는 몇 잔을 연거푸 더 비웠다. 오늘따라 술이 몹시 달았다.
“꺽. 여기 얼마에요?”
“2만5천원. 다음부턴 안주보다 술을 더 많이 처먹으면 아예 안 팔줄 알아.”
“아 네네. 다음엔 안주 하나 더시킬게요, 아줌마.”
“누가 안주를 더 시키래! 술을 덜 마시라는 거지. 조심해서 어서 들어가.”
계산을 하고 나오니 하늘이 새카맸다. 시간이 상당히 많이 된 거 같은데 많이 되면 어떻고 안 되면 또 어떠리. 나는 굳이 시계를 확인하지 않았다. 날씨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밤공기가 차긴 커녕 오히려 따뜻했다. 오늘 밤은 왠지 정말 따뜻했다.
2017년 7월 7일 금요일.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확인한 오늘의 날짜는 바로 어제의 다음날이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기억을 잃은 날로부터 벌써 한 달이 넘게 지났지만 어제의 다음날이 오늘이 아닌 내일이 되는 일은 아직까지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기억을 잃어버린 날의 초능력이 필요했다. 초능력을 사용한 대가가 단지 그 날의 기억을 잃는 거라면 이제는 얼마든지 사용할 용의가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기현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불안에 떨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내 능력 이상의 일을 해낼 수만 있다면 한 달에 몇 번이고 기억을 잃을 준비가 돼있다. 하지만 지난 한달 간 나의 날들은 기억을 잃기 시작하기 전의 날들처럼 지독히도 평범한 날들로만 채워졌다.
5월엔 두 번의 기억을 잃은 덕에 월간 판매왕의 자리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지만 6월엔 판매대수 2대로 곤두박질쳤다. 나는 다시 한 번 기억을 잃고 싶었다. 반복해서 기억을 잃고 싶었다. 하지만 눈을 뜨면 어제와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오늘이 평범하게 시작되었다.
결국 이번 주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빠짐없이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말았다. 금단의 영역을 맛본 뒤로 평범한 하루하루가 주는 피로감이 그 전보다 배는 더 크게 느껴졌다.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편의점에 들렀다. 참이슬 오리지널 두 병과 과자 몇 개를 집어 들었다. 나는 집은 물건들을 카운터로 들고 가서 내려놓고 말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다 해서 5천300원입니다. 봉투에 담아드릴까요?”
생기 넘치는 목소리였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계산하는 직원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 갗 스물이나 넘었을까. 눈앞엔 앳된 얼굴의 소녀가 밝게 웃고 있었다.
직업적인 미소일까. 아니면 오늘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 것일까. 나도 저렇게 활짝 웃었던 적이 있었을까? 요즘엔 개그프로를 봐도 무표정해지니 있었다면 꽤나 오래전 일이 틀림없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나는 발랄한 목소리를 뒤로 한 채 편의점을 나왔다.
집에 들어와 보지 않는 TV를 틀어놓고 연신 비워지는 잔에 술을 계속 채웠다. 처음에 몇 개 집어먹던 과자는 반도 먹지 않았는데 손이 가질 않았다. 나는 그저 채워진 잔을 비우고 다시 채우는 일을 반복할 따름이었다.
잠깐이나마 이 빌어먹을 인생이 변할 수도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들떠 있었던 거 같다. 나는 지지리 운도, 능력도, 아무것도 없는 잉여인간이었는데 헛된 기대감에 빠져 잘못된 망상을 했던 거 같다. 어느새 다 비운 잔 위로 짠 물방울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2017년 7월 9일 일요일.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오전 10시다. 이 시간에 내게 전화할 사람은 없을 텐데 대체 누구지. 더듬거리며 찾은 핸드폰엔 낯선 핸드폰번호가 찍혀있었다.
“여보세요.”
스팸은 아닌 거 같아 반쯤 감긴 눈으로 전화를 받았다. 주차는 가장 안쪽에 대놨기 때문에 차 때문에 전화한 건 아닐 텐데 전화기 너머 낯선 목소리가 들리기까지 무슨 전화일까 고민해봤지만 선뜻 떠오르는 건 없었다.
[아, 안녕하세요. 10시쯤 깨워달라고 하셔서. 전화 받고 일어나신 거예요?]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다만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고 단연코 10시쯤 깨워달라고 부탁한 적도, 부탁할 수 있는 사람도 내겐 없었다.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누군가를 깨워줄 정도의 친밀감을 형성한 상태라면 대게는 전화번호를 등록해놓고 연락처 목록에서 찾아 전화를 하지 않나. 이 낯선 여자는 왜 직접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건 걸까. 그것도 틀린 번호로. 더 생각하기도 귀찮다. 전화를 끊기 전 핸드폰에서 여자가 뭐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난 무시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오늘 진짜 무슨 날인가. 눈을 감고 채 1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 핸드폰이 울렸다. 연이어 잘못 걸려 올리는 없고 대체 뭘까. 이번엔 눈을 뜨지도 않고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 수빈이에요 정수빈.]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누군지는 알거 같았다. 왜냐하면 바로 좀 전에 전화를 했던 여자의 목소리와 꼭 같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잘못 걸었다고 얘기해줬는데도 왜 또 다시 잘못 건 걸까. 나는 조금 화가 났다.
“좀 전에 잘못 걸었다고 분명 말씀 드렸습니다만.”
나는 상당히 기분 나쁘다는 투로 말을 뱉었다. 이젠 상대방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아있다.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전화를 끊거나, 나의 나쁜 기분이 전염되어 아무 말도 없이 뚝 끊어버리거나.
상대방이 무얼 선택하든지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예상치도 못한 세 번째 선택지를 고르기 전 까지는.
[남규 오빠 핸드폰 맞잖아요. 저 수빈이라니까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장 최근에 오빠라고 불려본 적이 대체 언제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 들어본 호칭이라고 생각 하는 순간 불현 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지난 달 회식 때 간 노래방에서 내 옆자리에 앉았던 도우미아가씨가 연신 오빠, 오빠라고 불렀었다. 그 때 그 아가씨 이름이 수빈이었나? 그런데 나는 연락처를 건넨 적도 없었고 설령 건넸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먼저 연락을 해올 리가 만무했다.
[어젠 정말 고마웠어요. 근데 겨우 모닝콜 해드린 걸로 갚기엔 마음에 좀 걸려요. 그래서 말인데 제가 오늘 점심 살게요. 어제 거기서 보는 거 어때요?]
“어제 거기?”
[또 모른 척 하신다. 12시에 거기서 만나요. 아셨죠. 저 끊어요!]
전화가 끊어진 후에도 난 한참동안 멍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의 어제는 잠들기 전까지 마신 술이 전부인데 어째서 낯선 여성이 나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걸린 전화가 맞는데 놀랍게도 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내 이름을 똑똑히 불렀다.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흔치 않은 이름도 아니긴 하다. 하지만 잘못 전화를 걸었는데 마침 그 상대가 나랑 동명이인일 가능성은 대체 얼마쯤이나 될까?
혹시 어젯밤에 술에 취해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전할 일을 한 게 아닐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건 잘못 걸린 전화가 동명이인일 확률보다 더 적을 거 같았다.
그러다 문뜩 묘한 위화감이 치밀었다. 분명 뭔가 변해있었다. 단번에 떠오르진 않았지만 집안 어딘가가 뭔가 달라져 있었다. 소형 냉장고도 그대로고 벽에 시계도 그대로고 갈색 미니쇼파도 그 자리 그대로 인데 왜 뭔가가 달라진 거 같지. 작은 원룸에 얼마 안 되는 살림살이는 전부 제 위치에 있었지만 나는 계속 뭔가가 찜찜했다.
“술병!”
그래 술병이 없었다. 분명이 방에 널브러져 있어야할 과자부스러기와 빈 술병들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마치 우렁각시가 와서 청소라도 해 놓은 것처럼 집안이 몹시도 깨끗했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기분은 일전에도 몇 번 느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날짜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 설마는 곧 확신으로 변했다.
하루가 또 사라졌다.
이상하게도 숙취가 없이 개운하더라니 나의 숙취는 사라진 토요일과 함께 같이 사라졌다. 기억을 잃는다는 게 당연히 평일에만 적용되는 건줄 알았더니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내게 능력이 존재한다는 기쁨 반과 하필이면 주말의 기억을 잃어 아무런 실적을 올릴 수 없는 아쉬운 마음 반을 가지고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첫째, 나는 여전히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루의 기억을 온전히 잃었다는 게 그 증거이다. 다만 이 능력이 평일에만 나타나는 게 아님이 오늘로 인해 증명되었다.
둘째, 나의 특별한 능력은 꼭 업무실적에만 발휘되는 건 아니다. 내가 잃어버린 토요일의 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순 없지만 생면부지의 여성에게 오빠소리를 듣고 모닝콜 서비스를 받고 점심까지 얻어먹을 정도의 친밀감을 얻는다는 건 평소의 나로썬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건 나의 능력을 뛰어넘는 그 초능력 말곤 설명할 길이 없다.
셋째, 그래서 대체 그 여성은 누구이며 그녀를 만나려면 나는 대체 어디로 가면 되지?
그게 e북형식인데 그러면 출판사가 일 안한거고 스크롤 형식에 항상이 아닌 빈번히면 작가가 급하게 쓰느라 퇴고를 안한거고 항상이라면 정말 몰라서 그리 쓰는 겁니다.... 작가도 사람이다보니 급히 쓰면 뇌 필터링이 안되서 아는 것도 발음대로 쓰는 경우가 있어요. 붉은 줄이 쳐 지면 그나마 고치지만 하필 그 단어가 실존하는 단어라 오타로 못집어내면 그대로 올리죠.... 독자님들의 따뜻한 손길이 필요합니다